가을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진다. 바람은 얇은 겉옷 사이로 스며들고, 나뭇잎은 무채색 골목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늦가을의 골목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붉거나 노란 단풍의 절정이 지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거리에는 계절의 마지막 온기가 조용히 머물러 있다. 오늘 소개할 골목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깊은 시간을 품고 있는 곳들이다. 천천히 걷기만 해도 마음이 정리되는 길. 늦가을의 정서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국내의 숨은 골목 세 곳을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골목 풍경
북악산 자락 아래 자리한 부암동은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도심의 소음이 닿지 않는 마을이다. 특히 11월 중순 이후 단풍이 거의 다 지고 난 늦가을에는 그 고요함이 유난히 깊다. 오래된 벽돌집과 골목길 사이로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들이 서 있고, 회색빛 하늘과 잘 어울리는 낮은 지붕들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면 창문 너머로 오래된 책장이 보이고 예술가들의 작은 갤러리와 공방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부암동은 유명 관광지인 석파정, 백석동천과도 가깝지만 정작 진짜 매력은 그곳들로 이어지는 사이사이의 골목에 있다. 부서진 담벼락 기울어진 담쟁이덩굴, 이름 모를 고양이 한 마리까지도 이 풍경의 일부가 된다. 늦가을엔 카페보다는 아무도 없는 담벼락 아래 벤치에 앉아 계절이 사라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 더 낭만적이다. 낯설지 않지만 흔하지 않은 그 감정이 부암동엔 있다. 시간을 잠시 잊고 싶은 날, 늦가을의 부암동은 충분한 위로가 된다.
전북 군산 – 근대문화 골목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정적
군산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따라 걷는 역사 여행지로 익숙하지만, 사실 그 중심에는 골목이 있다. 군산의 진짜 매력은 근대문화유산보다 그 유산들을 잇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숨어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적산가옥, 일본식 목조건물, 붉은 벽돌의 교회 건물들이 조용히 서 있고 담장 아래로 고개를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늦가을의 군산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대가 된다.
특히 초원사진관에서 시작해 이성당 근처까지 이어지는 구도심 골목은 걷는 순간 자체가 여행이다. 상점 간판도 오래되고 가로등도 낮아 그 자체로 영화 세트장을 걷는 느낌을 준다. 사람은 드물고 바람은 느리게 분다. 오래된 건물 벽에 붙은 누런 전단지, 낡은 자전거 한 대 그리고 골목 끝에서 홀로 서 있는 가로등. 그런 것들이 모여 늦가을의 정서를 완성한다. 단풍 대신 빛 바랜 시간과 마주하는 이 거리엔 여행자의 발걸음이 묻힌다.
강원 강릉 서부시장 골목 – 바다와 산 사이, 일상의 틈에 스며드는 길
강릉이라고 하면 바다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강릉의 골목은 바다보다 더 진한 인상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서부시장 근처 골목길은 관광객의 발길에서 살짝 비켜선 곳이지만, 오래된 생활의 흔적과 지금의 감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동네다. 늦가을이 되면 시장 골목 끝자락의 가정집 담장 위로 단풍이 붉게 물들고, 작은 간판을 단 카페나 식당에서는 주인장의 손맛이 배어든 따뜻한 음식 냄새가 퍼진다.
이곳의 골목은 아주 짧거나 구불구불하다. 그래서 금방 길을 잃기도 하고 우연히 오래된 만화방이나 책방을 마주치기도 한다. 늦가을엔 걷는 것만으로도 배경이 되고 시장에서 사온 붕어빵을 들고 잠시 멈춰 서기에도 좋은 분위기가 흐른다. 골목 안쪽엔 작은 찻집도 여럿 있다. 수플레 팬케이크를 내는 곳, 정직하게 끓인 전통차를 내는 곳, 주인장 손글씨가 인상적인 북카페까지 다양하다. 그 공간마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과 은은한 조명이 늦가을 골목을 더 깊게 만든다.
여기선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걷고, 잠깐 앉아 있고,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강릉의 골목은 그렇게 사소한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늦가을의 감성이 찬찬히 스며드는 골목. 바다 대신 이 길들을 걷는 여행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