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이란 건 어쩌면 용기를 필요로 한다. 차가운 공기, 이른 해넘이, 불편한 이동까지. 하지만 그런 계절적 불편을 감수하고도 떠날 이유는 분명히 있다. 오히려 겨울이기에 더 빛나는 장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계절에는 가려졌던 풍경이 겨울엔 선명하게 드러나고 쓸쓸함이 오히려 풍경을 더 깊게 만든다. 이번에는 흔히 알려진 겨울 여행지가 아닌 여백이 아름답고 고요함 속에 이야기가 깃든 곳들. 겨울에만 보이는 매력을 가진 국내의 희소한 여행지를 소개한다.
강원 인제 방태산 – 숲과 얼음이 함께 숨 쉬는 계절의 틈
강원도 인제군 깊은 산속에 자리한 방태산은 여름엔 계곡, 가을엔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겨울엔 오히려 그 고요함으로 빛나는 곳이다. 방태산 자연휴양림 근처로 들어서면 눈으로 덮인 숲과 얼어붙은 계곡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펼쳐진다. 특히 12월 중순 이후 본격적인 눈이 내리면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져 산 전체가 정적에 감싸인다.
계곡물은 얼어붙고 그 위로 눈이 내려 마치 유리와 솜이 겹쳐진 듯한 질감의 풍경이 완성된다. 자연휴양림 내 오솔길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어 체력 부담이 덜한 편이고, 한적한 산책을 원한다면 최적의 장소다. 눈 쌓인 숲길을 걷다 보면 귀에 들리는 건 오직 발자국 소리와 멀리서 부는 겨울 바람뿐이다. 커피 한 잔을 보온병에 담아 들고 가 나무벤치에 잠시 앉아 계절의 온도 차이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방태산은 상업적인 조명이 없기에 날씨만 맑다면 별빛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의 어둠은 길지만 그만큼 별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캠핑보다는 조용한 휴식과 사색이 어울리는 곳. 이름처럼 숨겨진 태산 같은 겨울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숲의 여행지다.
전남 장흥 천관산 – 남도의 겨울 바람을 품은 조용한 산행지
남도에 위치한 장흥의 천관산은 대부분 봄 진달래나 가을 억새철에만 주목받는다. 하지만 겨울의 천관산은 그 어떤 계절보다 단단하고 잔잔한 매력을 지닌다. 해발 72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기이하고 암릉이 많은 데다 남해 바다가 보이는 풍광 덕에 한겨울에도 독특한 매력을 뿜는다. 특히 눈이 적게 오는 남부 지방에서도 드물게 눈이 내리는 날엔 천관산 등성이에만 하얗게 소복이 쌓여 있어 마치 붓으로 그린 수묵화처럼 보인다.
천관산의 매력은 산 정상까지의 길보다도 중턱의 고요한 숲길과 능선을 타는 바람에 있다. 겨울에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마치 혼자만의 산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낙엽이 모두 진 너른 숲길을 걷는 동안에는 새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고 겨울 바람이 가지 사이를 스치며 길을 안내한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득량만과 장흥 바다도 겨울이면 물빛이 더 짙고 차분해진다.
한적함을 넘어선 고요함, 그리고 걷기만 해도 마음이 정돈되는 공간. 천관산은 그런 겨울 산행의 미학을 가진 드문 여행지다. 따뜻한 남쪽에 있으면서도 겨울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특별한 장소다.
충북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 눈과 고택이 어우러진 고요한 겨울 풍경
청풍문화재단지는 충북 제천 청풍호반 근처에 위치한 고택단지로, 조선 시대 건축물을 모아둔 전통 마을 형태의 문화유산 공간이다. 평소에도 조용한 편이지만 겨울이 되면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에 잠긴다. 하얀 눈이 기와지붕 위에 소복이 내려앉고 얼어붙은 돌담길 사이로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고요한 풍경 속에 들어선 고택들은 계절을 품은 채 오롯이 서 있고, 방문객은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청풍문화재단지는 관람료가 있는 유료 시설이지만 입장객이 많지 않아 조용히 머물기 좋은 공간이다. 재현된 옛 마을을 걷는 기분으로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마치 조선 시대 겨울 풍경화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특히 늦은 오후 해가 기울 무렵엔 하늘빛과 눈이 어우러져 더욱 분위기 있다. 청풍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올라가면 겨울빛이 내려앉은 호수와 설경이 함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겨울의 정적, 전통 건축의 곡선, 그리고 바람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풍경. 여름이나 가을에는 느낄 수 없는 그 여백이 청풍문화재단지엔 있다. 전통과 계절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이 고요한 공간은 겨울 여행지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