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지나쳐야만 할 것 같은 도로 위에서 가끔은 차를 세우고 싶은 충동이 든다. 도심을 빠져나와 국도를 달리고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마을들. 차로는 더 이상 갈 수 없고 걷거나 배를 타거나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만 하는 그런 장소들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오늘은 도로가 끊긴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풍경들 그리고 그 안에서 시간을 다르게 살아가는 마을 세 곳을 소개한다. 지도로는 연결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오래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전남 고흥 애도 – 섬 끝 바다 위 고요한 마을
전라남도 고흥의 다도해 해상에 숨은 애도는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는 섬이다. 차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 고흥 녹동항에서 하루 몇 번 다니는 배편에 몸을 싣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는 마을이다. 애도는 이름처럼 애잔한 풍경을 간직한 섬이다. 마을의 집들은 낮은 돌담과 조용한 골목으로 이어져 있고 바다를 향해 열린 창문들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섬엔 별다른 관광지가 없다. 대신 고요한 바다 위에 바삐 움직이는 작은 배, 해 질 무렵마다 물드는 바닷가의 색감, 그리고 마을 앞 선착장에서 아무 말 없이 낚시를 하는 어르신들이 애도의 일상이다.
이 섬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단순하다. 천천히 걸으며 바람을 느끼고 마을 안쪽 작은 슈퍼에서 음료 하나 사 마시며 돌담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된다. 도로가 끊긴 바다 끝에서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다시 배우게 되는 곳이다.
강원 인제 방태산 자작나무길 – 차로 닿지 않는 숲의 깊은 고요
강원도 인제 방태산 깊은 자락에는 자작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길이 있다. 이곳은 일반적인 도로로는 접근할 수 없으며, 숲길 입구까지 차를 타고 올라간 후 오로지 걸어서만 들어가야 한다. 방태산 자작나무숲은 유명한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고 관리시설도 거의 없어 오히려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흙길과 자작나무가 만드는 흑백의 조화는 신비롭고도 단정한 풍경을 만든다. 가을이 되면 하얀 나무 기둥 사이로 노란 낙엽이 흩날리고,겨울엔 눈이 내려 숲 전체가 순백으로 변한다.
걸음을 멈출수록 숲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작은 바람에도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멀리서 들려오는 새 소리. 이곳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자연과 나 사이의 거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끝까지 차로 달릴 수 없기에 이 숲길은 오히려 더 깊은 기억을 남긴다.
경남 하동 평사리 들녘 끝 – 국도가 닿지 않는 녹색 고요
하동은 이미 여러 차례 문학과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여행지지만 평사리 들판의 진짜 끝자락까지 가본 사람은 드물다. 대형 주차장이나 유명한 정자에서 조금 더 걸어 나가다 보면 포장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그 뒤로는 논두렁 길만이 이어진다. 그 길의 끝에는 수풀 속에 묻힌 조용한 마을이 하나 있다. 지도에도 이름이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이 마을은 몇 채의 오래된 집과 쓰러져가는 헛간 그리고 넓은 논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농번기가 아닌 이상 거의 사람이 드나들지 않으며 간혹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가는 이가 전부다. 봄이면 들판을 가르는 수로 위로 햇빛이 반짝이고 여름엔 녹음이 머리 위까지 솟아오른다. 가을엔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만들고 겨울이면 아예 길이 끊긴 듯한 정적이 온 마을을 감싼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길. 그래서 더 오래 머물고 싶은 풍경. 평사리 끝자락의 이 마을은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서 여행의 시작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