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여행은 지도를 따라간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교통편을 확인하며 숙소까지 미리 예약하는 치밀함 속에서 우리는 확실한 여행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곳이 그렇게 검색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장소는 아직도 지도의 경계 바깥에 있고 누군가의 기억이나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오늘은 그런 곳 지도에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국내의 미공개 여행지를 찾아 떠난다. 낯선 길을 따라가다 우연히 마주친 마을, 인터넷에선 찾을 수 없는 비경,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는 장소들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충남 예산 외딴집 마을 – 산길 끝 잊힌 터전
예산군 덕산면 어느 깊은 산자락. 도로가 끝나기 전까진 아무도 이곳에 마을이 있을 거라 상상하지 않는다. 좁은 임도를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마지막 커브에서 한 채의 초가집이 보인다. 마당엔 쓰러진 장독대가 있고, 집 뒤편으론 감나무 몇 그루가 늙은 채 서 있다. 이곳은 더 이상 마을로 불리지 않는다. 주소도, 표지도 없는 곳.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의 삶이 있던 자리다.
근처에서 밭을 일구던 어르신에게 물으니 여긴 외딴집이라고 불렸단다. 30여 년 전까지도 다섯 가구가 모여 살았고 여름이면 계곡물로 수박을 식히고 겨울엔 땔감을 쌓아 놓으며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다 비워졌고 마지막 집만이 흙과 바람을 품은 채 남아 있다. 주변엔 풀벌레 소리뿐. 이곳에선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있다. 한참을 머물다가 돌아서려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멈춘 자리, 하지만 자연은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강원 평창 청옥산 너머 무명 계곡 – 이름 없는 물소리의 길
평창 청옥산 자락에는 유명한 휴양림과 등산로들이 있지만 그 너머로는 아무 표식도 없는 숲길이 이어진다. 이 길은 지역 주민들만 아는 계곡으로 연결되며 이름 없는 계곡이라 불린다. 사실 이 계곡은 공식 지도에는 실선 하나조차 없다. 네비게이션에 찍히지도 않고 현지 간판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도달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경험이 필요하다. 운이 좋게도 한 지역주민의 안내로 진입할 수 있었고 좁은 임도를 따라 차량으로 이동한 후 도보로 약 1.5km 정도를 걸었다. 깊은 숲 속에서 계곡물이 처음 들려올 때, 마치 숨겨진 장소와 조용한 약속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이 계곡은 소박하지만 맑고 투명한 물이 인상적이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얕은 웅덩이들 이끼가 낀 바위 위로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그 물소리를 뒤덮는 숲의 정적. 아무도 없는 한낮의 계곡은 오히려 생기 가득한 공간이었다.
도심에서 벗어난 지 오래,그늘 속의 차가운 바람이 오히려 반가운 이 계곡은 어떤 지도에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마음속 가장 선명한 여행지로 남는다.
전북 진안 구봉산 아래 폐광촌 – 기억에서 지워진 마을
진안 구봉산은 트래킹 명소로 유명하지만 그 아래 한쪽 비탈에 조용히 숨어 있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폐광촌으로 남은 이 마을은 한때 수백 명이 살았던 광산촌이었다. 광산이 문을 닫은 후 마을도 서서히 기능을 멈췄고 지금은 세 채의 빈집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마을 입구는 갈대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비포장 도로가 잠시 이어지다 이내 사라지고 고요한 나무 숲 사이로 시멘트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한 폐건물이 나타난다. 유리창은 모두 깨졌고 내부엔 광산 작업자들이 사용하던 벽걸이 달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근 산책로도 이 마을은 비껴간다. 그래서 더욱 현실감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벽 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무너진 담벼락 옆으로 피어난 풀꽃들, 여전히 굴뚝 위에 걸려 있는 낡은 깃발은 이 마을이 한때 분명히 살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록되지 않았기에 더 강하게 기억되는 풍경. 이곳은 지도에도, 블로그에도, 검색창에도 없다. 오직 마주한 사람의 눈과 마음에만 남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