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모든 풍경을 낯설게 바꾼다. 익숙한 길도, 흔한 건물도, 한순간에 다른 세상이 된다. 특히 오래된 마을 지붕 위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현실의 공간이 아니다. 사람의 손때가 느껴지던 벽돌집, 오랜 시간을 품은 기와, 굴뚝 끝에 걸린 하얀 숨결까지. 모두가 멈춰 있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시간보다 더 느리게 머물게 된다. 오늘은 그런 겨울의 마을 설경이 가장 아름다운 세 곳을 소개한다. 눈 내린 지붕 아래 흘러가는 고요한 겨울을 따라가 보자.
강원도 인제 원대리 – 구름 아래 하얀 마을
인제는 겨울이면 순백의 땅이 된다. 그 중에서도 원대리는 특히 아름다운 설경으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부터 이어지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얗게 덮인 논과 밭이 펼쳐지고, 그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이 마치 고요한 바다처럼 느껴진다.
원대리는 마을 전체가 낮은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이 내리면 지붕 위 설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전통 가옥과 슬레이트 지붕들이 조용히 눈을 받아들이고 굴뚝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로 천천히 스며든다. 아침에는 옅은 안개가 눈 위를 덮어 풍경이 몽환적으로 흐려지기도 한다.
마을 중심에는 옛 우체국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작은 공간이지만 붉은 벽돌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은 마치 시간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동네 어귀 작은 슈퍼에서 파는 군고구마를 손에 쥐고 천천히 눈길을 걷다 보면 계절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오래된 기억을 따라 걷는 느낌이 든다.
사람도 적고, 소리도 없다. 그저 지붕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눈과 바닥에서 반짝이는 얼음의 결만이 이 겨울을 증명해준다. 원대리는 그런 조용한 아름다움을 지닌 마을이다.
전북 진안 운장마을 – 백설 속 붉은 기와
운장산 자락에 자리한 진안 운장마을은 겨울이면 말 그대로 설국이 된다. 이곳은 고도도 높고 주변에 울창한 숲이 많아 첫눈이 오면 쉽게 녹지 않는다. 그 덕분에 지붕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이 며칠이고 머물러 설경의 깊이를 더해준다.
운장마을의 매력은 고풍스러운 기와집이다.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고택들은 대부분 70~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닌 집들로 붉은 기와지붕 위로 내리는 눈은 색감의 대비를 극적으로 만든다. 눈이 덮인 후에도 붉은 기와의 결은 선명히 드러나며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마을 안에는 소박한 전통 찻집이 하나 있다. 장작을 때는 아궁이방에 앉아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창밖의 설경이 액자처럼 펼쳐진다. 방문을 열고 나서면 바스락거리는 눈을 밟으며 한 걸음씩 걷게 된다.
운장마을의 겨울은 빠르지 않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누구도 떠밀지 않는다. 시간을 조금 내려놓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곳의 지붕 위 설경은 말없이 곁에 있어 준다.
충북 제천 박달재 마을 – 눈 내린 전설의 길
박달재는 정이 품은 고개’라 불릴 만큼 오랜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제천과 단양 사이, 깊은 산자락을 넘어 이어지는 이 고개에는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모여 있다. 그중 박달재 마을은 전설과 눈이 함께 머무는 공간이다.
겨울이 되면 마을은 하얗게 덮이고 고개 위에서부터 내려온 눈은 기와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다. 마을은 크지 않다. 길게 늘어진 골목 하나, 작은 고택 몇 채 그리고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눈길.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풍경은 크다.
박달재 마을은 제천 시내에서 멀지 않지만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다. 조용한 아침, 눈 쌓인 대문 앞을 지나면 집집마다 걸린 작은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이따금 굴뚝 연기가 하늘로 흘러간다. 전설 속 아련한 사랑 이야기가 더해져서일까 이 마을의 겨울은 유독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마을 끝자락엔 작은 정자가 있다. 거기 앉아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면, 흰 지붕들이 파도처럼 펼쳐진다. 눈이 멈춘 자리, 바람조차 잠든 듯한 공간. 그곳에서 보내는 한 시간은 일상의 소란을 모두 녹여주는 듯하다.